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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인생이다

연구라는 업을 포기해야 할까요?

제목이 좀 자극적인가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심각히 고민 중인 공돌이입니다. 인생 선배님들의 조언을 듣고자 처음으로 글 써보네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거나 했던 분들이 있으리라 믿고... 공감, 충고, 조언, 질책 아무거나 부탁드립니다.


과학고 - 서카포 학부 - 동대학 석박사 (도중 소규모 연구소 들어가 파트타임) - 대기업 연구소 - 대기업 사업부 이렇게 테크트리를 거쳐왔습니다. 진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몇달 전 연구소->사업부 이동하면서이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구라는 업을 계속 하는게 맞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진로 문제로 여러 사람들과 얘기도 해보고 상담도 받아봤어요. 검색도 참 많이 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구라는 직종이 저에게 맞지 않는 걸로 느껴집니다. 연구가 재미없는건 아닙니다. 여전히 재미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직종은 맞지 않는것 같네요.


처음엔, 가장 큰 이유는 공부와 연구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부 시절 공부는 참 재밌었습니다. 즉, 강의 듣고, 안 넘어가는 전공서적 한장한장 씹어먹어가며 이해하게 되는 희열은... 그땐 인생에서 제일 재밌는게 축구랑 공부였으니까요. 모든 과목이 재미있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열심히 했고 그만큼 성적도 잘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에 들어갈때까지, 아니죠. 들어가서도 한참동안 공부와 연구가 이음동의어인줄 알았던게 인생의 첫번째 큰 실수겠죠. 대학원 연구도 강의 듣는 것처럼 하면 잘 될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코스웤처럼 이미 잘 짜여진 길 같은게 없으니, 그때부터 길을 잃고 방황을 시작했달까요. 하여튼 연구자로서 철이 드는데 한참이 걸렸습니다. 우왕좌왕 하며 겨우겨우 졸업은 했습니다. 많이들 얘기하는 물박사 of 물박사로.


사실 진짜 첫번째 실수는 이학이 아닌 공학을 선택한것... 성적을 봐도 그렇고, 개인적인 취향을 봐도 그렇고 성향 자체가 science 향이더라고요. 뭐 결국 순간의 판단미스입니다만, 그게 포인트는 아니니 각설하고.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공부만 적성에 맞고 연구는 아닌건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또 '공부와 연구는 다르다'라는 주제로 한참을 고민하고 뒤져봤죠. 비슷한 고민을 한 분들이 이미 계시더군요. 이곳 싸이엔지를 포함해서. 그 결과 이렇게 요약되더군요. "공부-taking classes-는 남들이 다 해놓은 걸 답습하는 것, 연구-doing research-는 아무도 하지 않은 거라서 내가 처음 하는 것"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가 연구적성이 아닌건 또 아닌것 같더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했던 일들 중에서 정말 내 피를 끓게 하고 달아오르게 했던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연구자의 기질도 분명히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문제점파악-해결방안모색-아이디어도출-검증-평가 이 과정이 참 재미있었단 말입니다. 공부보다 어려운 게 연구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도전하고픈 욕구도 충분히 가지고 있고요.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제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공부는 재밌습니다. 연구도 재밌습니다. 근데 저의 진짜 문제는, 저의 연구력을 포장하는게 참 재미없습니다. 논문 실적이 참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특허도 별반 다르지 않고요. 출신학교야, 이젠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분들로도 포화 상태라고 하니 서카포로는 그냥 중간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교수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수 되려면 논문 많이 쓰라고 합니다. 하지만 교수가 된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어서 좋다"라는 얘기보다 "실적에 쫓기고 학생들은 답답하고 돈 따러 다니느라 바쁘다"라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그런 말 몇번 들으니 교수직도 내가 꿈꾸는 것만큼 달달한 건 아니라는 결론이 나버렸고, 그 꿈은 이제 거의 접었습니다. 물론 달달한 것만 찾으면 되겠냐고 질책할 분도 계시겠죠. 하지만 교수가 되었을 때 내가 생각한 장점보다 생각하지 못한 단점이 더 부각된다면 그건 제가 원하는 길은 아니라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논문실적에 치이지 않으면서 적당히 재밌게 다니기엔 회사 연구소만한 데가 없더군요. (이건 회사마다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걸 100% 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논문 쓰라고 쪼진 않죠. 특허는 좀 쓰라고 합니다. 하지만 특허작성과 논문작성의 난이도 차이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죠. 논문이 아니라 연구 과제 수행능력과 실적으로 평가받는 시스템이니 저 같은 사람에겐 참 좋은 데였던 것 같습니다. 회사 연구소도 결국 회사이니 연구자 기질인 사람은 맞지 않다...라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니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는 돈, 승진에 욕심 없고 업무 자체가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회사를 위해 일하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다녔기 때문에 재밌게 다닐수 있었지 싶네요. (친구가 그러더군요. 행복을 가져다 주는건 돈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라고. 너무 이상적인가요? ㅋ)


지금은 연구소가 아니라 다른 부서로 옮겼고... 아, 물론 직책은 여전히 연구원이긴 합니다만. 연구소에 있을 때와는 부서의 존재 이유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업무의 성격도 참 많이 다릅니다.


지금 이 부서를 다니는건 정말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돈은 주니까 다닌다는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침마다 출근하기가 참 고역스러울 정도로... 그렇다고 다른 데로 옮기자니, 그것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앞서 썼듯이, 연구직으로 가려면 CV에 쓰는 출신학교와 논문실적과 기타 실적 등으로 저를 평가받아야겠죠. 그 중 가장 중요한건 아마 논문실적이겠지요. 그것이 저의 연구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객관적 잣대가 될 테니. (논문생산력과 연구 능력이 완전히 같은 의미라는데는 동의하지 않지만요.)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논문쓰기가 참 재미없습니다. 돌이켜보면 1저자로 논문을 쓸 만한 일은 몇번 했습니다. 나름 칭찬받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근데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걸 정리하고 publish 하기까지의 과정이 참 갑갑해 보였달까요. 그래서 진도를 못 빼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CV에 쓸게 몇개 거의 없네요. 논문 갯수나 quality로 평가받는 것도 싫고요, 그런걸로 나를 포장해야 하는 것도 정말 재미 없습니다. 다른 회사 연구소로 가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근데 회사 생활 몇년 해보니, 이 상태에서 다른 회사를 간다고 해도 그건 최악을 겨우 피한 차악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단 말이죠. 그리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연구인력이 회사에서 회사로 이직하는건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는요.


아, 물론 지금의 이공계 시스템 상 어쩔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당장 저한테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저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일단 같이 일해보고 추후에 결정한다? 쉽지 않겠죠. 추천을 받는다? 추천이라는 제도도 취약점이 있죠. 결국 객관적인 지표로 보기에 가장 쉬운게 논문실적...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이 이러하니 감내하고 적응하든지 아니면 도태되어라...라고 하는건 이 시스템에 맞지 않는 저같은 사람에겐 너무 잔인한거 아닐까요.


"학계를 떠나는 한 박사과정 학생의 뜨거울 질타"라는 제목으로 한때 이슈가 됐던 스위스 대학원생의 글이 있죠. 아마 아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 글도 읽어보고 여기저기 달린 댓글도 다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댓글도 있고 억지스럽거나 꼰대스러운 댓글도 있더군요. 공감하는 사람도 많고 나약하다며 질책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더라고요.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연구는 없고, 인기 있는 분야는 돈이 많이 오가니 그런 분야를 해야 돈벌이가 되고, 그러려면 나도 돈을 따러 다녀야 하고... 생각만 해도 지겹습니다. 교수가 되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네, 저 자본주의 싫어합니다. 지금 이 세상을 병들게 한 두가지가 자본주의와 종교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순기능도 있지만, 역기능이 더 크다고 봅니다. 이건 제 철학이니까 접어두고요. 아, 그리고 전형적인 2인자 유형입니다. 앞서서 뭐 하는거 성격상 맞질 않네요. 그래서 누구든 리더가 되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이 사회가 참 싫습니다. 사람한테 이리저리 치이는 것도 싫고... 잡설이 기네요. 각설하고.


결론짓자면, 공부도 재미있고, 연구도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연구력을 이쁘게 포장하여 스스로를 잘 팔리는 연구자로 보이게 하는 것... 이게 너무 재미없고 갑갑합니다. 이런 저라면... 연구라는 업을 떠나야 하는 걸까요? 선배님들의 조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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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질문... 넓게 공부하는 것 vs. 깊게 공부하는 것.

제가 평가하는 제 자신은 넓게 공부하는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것도 연구 지속이냐 포기냐를 선택하는데에 중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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