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글을 싼다

페트로스 삼촌과 골드바흐의 추측

제목: 골드바흐의 추측

(원제: Uncle Petros and Goldbach's Conjecture)

지은이: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옮긴이: 정회성


0. 요약


(영화평론가 이동진 식 표현을 빌려)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학적 예술과 소설적 재미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손에 잡았다. 딱 이틀만에 읽었다.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린 나에게 이 정도면 굉장한 속도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재밌었다. 비유를 들자면, 천재 수학자의 생애를 그린 영화 - 뷰티풀 마인드, 이미테이션 게임 등 - 를 볼 때와 비슷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수학 덕후의 입장에서 쓴 독후감이기에 주관이 많이 들어갔음을 미리 밝힙니다. ㅋㅋ)


1. 어떤 내용?


수학 관련 교양서인가 싶은 오해를 부르기 딱 좋은 제목이지만, 사실 수학자의 삶을 그린 소설책이다. (원제에 충실하게 제목에 페트로스 삼촌만 넣었어도 그런 오해는 없었을 것을...) 골드바흐 추측은 250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고 있는 최고급 떡밥 소수(prime number)에 대한 문제다. 문제는 정말 간단하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초강력 수학 떡밥이 그렇듯이, 문제는 간단하고 풀기는 토나오게 어렵다. (페르마의 대정리를 생각해보라.) 골드바흐 추측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요기에 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책은 골드바흐 추측을 풀고자 했던 수학자 얘기다.


책 구성은 일종의 팩션(faction)이다. 20세기 초중반 실제 수학사를 배경으로 두고, 허구의 인물인 '페트로스 삼촌'을 묘하게 끼워넣는다. '삼촌'인 이유는 수학자 페트로스의 조카가 삼촌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형태이기 때문. 조카의 이름은 "내가 가장 아끼는 조카" (...) 믿으면 골룸 (실제로 조카 이름은 나오지도 않는다.) 팩션인 만큼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은 대부분 한번씩 이름이 언급된다. 하디+리틀우드 콤비, 요절한 인디안 천재 라마누잔, 미친 수학자 시리즈 괴델 튜링 칸토어, 떡밥 제조기 힐베르트, 논리왕 러셀+화이트헤드(흰머리), 그 외에도 푸앵카레, 아다마르, 발레푸생 등등등... (쩌리처리해서 죄송) (그나저나 에어디쉬가 없네) 그리고 또 한명의 위대한 수학자 페트로스는 골드바흐 추측을 풀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성공했을까? 그건 스포라서 말할 수 없다. 참고로 그 당시 이미 많은 수학자들이 매달려 있던 그 유명한 리만 가설을 목표로 하지 않은 이유는...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라. ㅋㅋ (사실 그 이유는 자못 진지하고 중요하다.)


2. 좋았던 점은?


리만 가설, 골드바흐 추측, 하디, 라마누잔, 힐베르트, ... 수학이라는 학문을 진지하게 공부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단어들이 갖는 의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축구를 좋아하는 누군가라면 챔피언스 리그, 월드컵, 메시, 호날두, 루니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면 되고, 야구를 좋아하는 누군가라면 메이저리그,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다른 분야는 내가 잘 몰라서;;;) 이 책은 20세기 초중반의 탑 클래스 수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는 것 같은 간접경험을 하게 해 준다. 그들과의 공동연구, 성공과 좌절의 순간들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 가상의 인물인 페트로스를 집어넣었음에도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고 절묘하게 자연스럽다. "아~ 역사의 밝혀지지 않은 이면엔 이런 장면들이 있었군."이라는 느낌. 하디와 라마누잔의 1729 사건 당시 그 자리에 페트로스도 있었지만 하디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라는 식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좋았던 점은,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특징, 특히 그 고독함에 대해 굉장히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 수학은 무형의, 추상적인 지적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도의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창의성이라는 것은 결코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그것을 본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진정한 수학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학자의 창의성은 대부분 30살 이전에 모두 소진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정설. 그래서 페트로스도 그 조급함에 스스로의 정신을 망가트려버린다. 또한 수학자는 고독하다. 그 고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독과는 좀 다르다. 수학자가 느끼는 기쁨, 슬픔, 환희, 좌절의 감정들은 보통의 사람이 공감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수학자는 예술가와 맥이 닿아 있다.


수학자의 심리를 잘 묘사한 책이 한권 더 있다. 위에 언급한 하디가 실제로 쓴 수필 '어느 수학자의 변명'. 이 책은 첫 문장부터 아름답다. "전문적인 수학자가 수학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울한 경험이다."


어쨌든 한때나마 수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나에게 있어 이 책은... 거품 물 정도의 흥분과, 그만큼의 좌절을 되새기게 해 준 책이다. 응원과 현실을 아직 구별하지 못하던 시절, 내 앞길은 탄탄대로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재능에 아주 작은 의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의심의 싹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 결국 수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수학자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타고난 수학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 수학을 전공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다는 페트로스의 말... 결국 수학을 계속 했어도 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했다.


3. 안 좋았던 점은?


이것만은 꼭 쓰고 싶다.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은 책 맨 앞에 있는 감수자의 말을 반드시 건너뛸 것. 스포도 이런 스포가 없다. ㅋㅋ 거의 출발비디오 여행 급. 솔직히 난 김이 많이 샜다. --;;


4. 마무으리!


수학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다른 학문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별점을 갖는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소위 '먹고 사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수학문제들을 풀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들의 노고를 항상 위로하고 응원하겠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리만 가설과 골드바흐 추측(과 그 외 떡밥들)이 해결되는 장면을 봤으면 한다.


나름 괜찮은 명언들이 책 중간중간 갑툭튀한다. 그 중 하나를 쓰며 글을 마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도전에 의해 절망할 권리가 있다."